때는 1592년 한창 조선팔도가 일본군에게 탈탈 털리던 시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은 조선-만주 국경에 도달한다 가토는 함경도에서 임해군을 포로로 잡기도 한다 기요마사는 원래의 목표인 짱개 침공을 위한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1500명 정도의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만주를 탐사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시 기요마사가 이끌고간 병력의 대다수는 조총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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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은 웅천을 급습해 잘 싸웠으나,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군량 200석, 전함 수십 척을 상실하였다. 칠천해전(漆川海戰)의 초반전인 14, 15일 싸움에서 패한 뒤, 15일 저녁에 원균이 여러 장수를 소집해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으나, 배설은 전세가 불리함을 짐작하고 비밀리에 퇴각할 것을 모의했다.
7월 16일 적의 대선단이 원균의 주력 부대를 공격해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배설은 전세를 관망하다가 스스로의 판단으로 12척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여 안전을 도모하였다. 한산도로 물러난 뒤 군사 시설 및 양곡·군기와 군용 자재를 불태우고 남아 있던 백성들을 피난시켰다.
이순신(李舜臣)이 다시 수군통제사가 된 뒤 한때 그의 지휘를 받았으나, 1597년 신병을 치료하겠다고 허가를 받은 뒤 도망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전국에 체포 명령을 내렸으나 종적을 찾지 못하다가, 1599년 선산에서 권율(權慄)에게 붙잡혀 서울에서 참형되고 아버지와 아들 배상충(裵尙忠) 등은 모두 방면되었다.
그 뒤 쌓은 무공이 인정되어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증손 배석휘(裵碩徽)가 지은 『가범(家範)』에 시조 2수가 전하는데, 선조 때의 시조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조선 시조문학사상 그 의의가 인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