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튿날 왜적들이 모두 동문(東門) 밖에 모여 칼을 빼들고 날뛰며 위세를 보이므로
주장이 용맹스럽고 건장한 활 잘 쏘는 사람 15명을 뽑아 적들의 기세를 살펴보며 접전(接戰)하게 하려 하니
왜적들이 되돌아 서서 서로 희롱하는 짓을 하며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을 보이었다.
우리 군사가 장전(長箭)을 쏘자 칼로 받아쳐 맞추지 못하게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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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때 을묘 왜변 당시 기록
장전을 쏘니까 왜구들이 칼로 쳐내는 무협지스러운 스킬을 선보임.
그래서 당황한 조선군은
편전(片箭)을 쏘자 왜인(倭人)들이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 명종 10년 을묘(1555) 5월 30일(계해)
조선이 활을 잘 쏜다는 건 편전의 위력이었음.
편전 –
반으로 쪼갠 대나무 통에 넣어서 쏘는 매우 짧은 특수한 화살
영화 최종병기 활에도 나옴
"한국인은 전투민족 "이라는 국뽕들도 있던데
반만년을 내내 대륙과 열도에서 쳐들어온 애들한테 약탈당하고 강간당하기만 했는데 전투민족임?
전투민족 아님. 한국인이 유별나게 침략을 많이 받고 전쟁을 많이 겪었다는 건 사실이 아님.
의외로 고려부터 평화 시기에 가까움.
삼한 시절부터 반도내의 소국들의 접전과 삼국 시기의 접전을 거쳐 통일신라 이후 평화를 지내다
후삼국 때 다시 접전 그런 식인데 일본은 에도막부 이전에 지방의 소규모 호족들의 난립에도 접전이 일상이었고
전국시대란 게 유력 호족들이 중앙으로 갔다가 접전이 대규모로 확산된 거고 일본 역사학자들은 그래서 지방 호족들의
접전을 다 하치면 일본 전국시대는 700년이란 주장도 있음,
중국은 뭐 왕조의 역사가 300년을 채우지 못 하는데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왕조 말기의 내란 등을 생각하면 전쟁이 극렬한 곳이었고
그나마 한반도가 중국 대륙의 세력들이 붙기 전에 북방 세력들이 후방을 안정화 시키기 위해 무력 시위한 전쟁과 두 번의 왜란 등을 제외 하면
큰 전쟁도 없었고 고려 때부터 이런 대륙의 형세 변화가 없었을 때 거의 평화 시기였음.
다만 고려는 몽골을 제외하면 자력으로 맞설 수있었는데 조선은 고려보다 군사가 약한 건 사실임.
고려가 몽골을 막아내지 못 한 건 아이러니하게 무신 정권이란 이유가 있음.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할 정예 중앙군의 무신 집권자의 사병화로 제대로 된 출병이 없었음.
몽골 침입 당시 지방의 지방군과 민병대로 방어를 하긴 했는데 저열한 수준과 턱없는 숫자로 잘 막아낸 걸 보면
중앙군이 합세했으면 몽골도 막아냈을 거란 생각은 들음.
애기살이라고도 부르고 일반 활의 반도 안되는 사이즈를 날리니까 보고 쳐낼래야 쳐낼수도 없고 존나 빠르고 적이 주워서 재활용도 할수가 없었다
편전 저거 명중률이 높지 않다고 들었는데
저걸로 잘 쏘려고 어마어마하게 훈련 했음.
뭐 조선은 여자들도 놀이로 활을 즐기고
왕도 매일 활을 쏘는 게 운동이었을 정도니
사실 편전이 아닌 국궁도 감으로 쏘는 거라
조선이 활을 잘 쏘는 건 이런 활소기를 일상으로 하는 환경 문제도 있지만
호랑이 때문인 이유도 있음.
호랑이를 창이나 검으로 잡을 수 없으니 활로 잡으려고 죽도로 병사들 훈련시킨 것도 있지.
이후 조총이 들어온 이후론 조총으로 잡았지만